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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 소설에서도 

헤어짐에 힘들어하는 두 남녀가 아니 사람들이 존재한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에 참석한 두 남녀..

사강과 지훈..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랑을 하게된 사강과 

오랜 연애끝에 이별을 맞이한 지훈은 

자연스럽게 엮이게 된다 



사실

긴 연애의 헤어짐이나 

짧은 연애의 헤어짐이나 

헤어짐의 무게는 같다고 생각한다


헤어짐은 나에게 없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잠을 못자기도 하고.. 식욕을 없애주기도 한다

또 때로는 상대의 행동에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치도록 보고싶어 불꺼진 그사람의 창문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스스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며 

조금이라도 그 기억속에 살려고 발악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또 그래서 들은은 일곱시 조찬모임에 참석하게 될지도..


결국 

소설속 속설의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이 시작의 안녕이라 말하듯

우리는 결국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가도록 

다시 툴 툴 털고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였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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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건 사강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정수였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쪽보다, 헤어지자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쪽이 늘 강자다.

  이별하는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이별을 선언한 사강이었다.

  정수는 평소처럼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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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이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살 때가 더 많다."



"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외로움은 

  바로 그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존재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어둠을 응시할 리 없다.

  아무리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뒷모습 같은 진실과 마주치려면, 목이 꺽이는 

  죽음을 각오한 채 명렬한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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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슬픈 쪽으로만 평등하다.

  인간은...

  어쩌면, 

  행복한 쪽으로는 늘 불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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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보다 쉬운게 아닐까.

  타인을 용서하면 거룩한 자비가 되겠지만, 나 자신을 쉽게 용서해버리고 나면

  그건 싸구려 자기변명이나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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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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